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르 몸젠 (문단 편집) == 업적 == * [[역사학]] 로마와 관련하여 평생 1,500개 이상의 논문 및 출간물을 발간하면서 오늘날까지도 로마사의 가장 권위있는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남아있다. 특히나 그는 당대 로마인들이 남긴 문서에만 집중하던 역사학계의 관행에서 벗어나 비석, 화폐와 같은 유물들을 중시하면서 로마사 연구의 새로운 체계를 뿌리내리게 했다. [[금석학]]의 경우 몸젠이 거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.[* 《라틴 금석문 전집》(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)을 기획한 사람이 바로 몸젠이다. 다만, 《그리스 금석문 전집》(Corpus Inscriptionum Graecarum)은 몸젠보다 먼저 아우구스트 뵈크(August Boeckh)가 기획했다.] 몸젠이 생전에 수집한 여러 비석들은 오늘날도 베를린 아카데미에 보관되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. 몸젠에게 불멸의 명예를 안겨준 '''《로마사》''' 1~3권의 경우, 그가 '''겨우 37세일 때''' 저술된 것이다(1854~1856년. 1년에 1권 꼴이다). 《로마사》 1권은 가장 긴 분량으로 이탈리아 통일과 [[포에니 전쟁]]까지, 2권은 그리스 복속까지, 3권은 카이사르의 죽음까지이다. 덕분에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고... 다만 후세에는 아쉬운 것이, 몸젠은 [[율리우스 카이사르]]의 죽음부터는 더 이상 책을 펴내지 않았다. 그는 《로마사》를 3권까지 쓴 뒤 제정을 다룬 4권을 '''건너 뛰고''' 70세가 다 된 1885년에 로마 속주를 다룬 5권을 먼저 써서 마무리지었다(1904년 유작으로 개정본 공개).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, 가장 유력한 설은 몸젠이 카이사르를 깊이 존경했고, 자기의 영웅이 죽은 이후의 역사를 쓸 마음이 안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. [[시오노 나나미|모 여사]]는 19세기 자유주의의 아들로 내심 공화정을 지지했던 몸젠이 차마 로마 제정이 수립되는 것을 서술할 엄두가 안나서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지만 글쎄... 어쨌든 당대에도 《로마사》를 완결지어달라는 독자들의 욕구가 빗발쳤지만 몸젠은 묵묵부답이었다. 또한 베를린 학술원의 대표로서, 동료들의 교회사 연구나 [[도미티아누스]] 황제가 설립한 라인 강 방어선 연구 등을 출판하는데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. * [[법학]] [[로마법]]과 [[채권법]]에 관련한 그의 연구는 훗날 [[바이마르 공화국]]의 헌법으로까지 이어지는 근대적 [[민법]] 체계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.[* 오늘날 로마법 연구자들이 《[[로마법 대전]]》 연구에 사용하는 표준 판본이 바로, 몸젠이 교감(校勘)한 것을 파울 크뤼거(Paul Krueger), 루돌프 쇨(Rudolf Schoell) 등이 다시 수정한 책이다.] * [[정치]] 몸젠은 독일 진보당 소속 의원으로 프로이센 하원과 제국의회(Reichstag)에서 거의 20년에 걸쳐 의정활동을 펼쳤다. 몸젠은 자유주의자로 통일 이후 여전히 전제적인 [[제2제국]]의 정치상에는 꽤나 실망을 했다고 전해진다. 특히나 [[오토 폰 비스마르크|비스마르크]]의 [[독일 사회민주당|사민당]] 탄압을 신나게 까시다가 코렁탕 먹을 뻔 하셨다고... 동시에 프로이센의 슐레스비히-홀슈타인 합병 시도를 지지했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.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그렇다고 사후에 등장하는 [[아돌프 히틀러|어떤 또라이]]와 같은 배타적 민족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으며, 소수민족(특히 유대인)의 독일 내 동화를 추구했다. 일단 본인부터가 덴마크계이니 뭐... 그런데 슬라브족은 [[두형]]만 보더라도 열등민족이라고 깐 적도 있다... [[우생학]]이 판치던 당시 시대에 따른 한계라고 봐야할 듯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